게임 찾아보기

2020. 7. 28.

고스트 오브 쓰시마, 구로사와 그리고 사무라이에 대한 정치적이고 근거 없는 믿음




선의의 존경으로 싼 짐 풀기

Unpacking the baggage of well-intentioned homage



[고스트 오브 쓰시마(Ghost of Tsushima)]는 사무라이들을 웅장하게 비추며 시작한다. 그들은 미려하게 구현된 갑옷을 입은 채 말에 올라 있다. 그 대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할지 고민하는 게임의 주인공 진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영웅인 진은 쓰시마를 가로지르면서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무사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진이 일대일 대결을 할 때마다 넓은 시각으로 진과 대결 상대가 한 화면에 담겨 영화와 같이 연출된다. 게임을 제작한 아티스트들은 전설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을 흠잡을 곳 없이 구현하고 있다.

인디와이어(IndieWire)와의 인터뷰에서 게임의 디렉터인 네이트 폭스(Nate Fox)는 “크게 영감을 받은 명인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엔터테이먼트 위클리(Entertainment Weekly)를 통해서도 그가 속한 게임 제작팀인 서커 펀치(Sucker Punch)가 받은 영향에 관해 설명했는데, 게임의 화면이 흑백으로 전환되는 “구로사와 모드”는 물론 게임의 제목도 영향을 받았으며, 구로사와 감독의 유명작인 [7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에서 “사무라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원작과 최대한 가까운 경험을 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게임에 쏟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구로사와”에서 사무라이 모험 물을 위한 큰 틀을 따왔을 뿐, 구로사와의 작품이 안고 있는 정체성과 문화는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구로사와의 작품만으로 사무라이를 다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정치세력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꾸준히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작품활동을 하던 1943에서 1993년 동안 사무라이 영화로 명성을 얻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평은 다양하게 갈린다. 사무라이 가문에서 자란 그의 배경에 주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서구의 유행을 노렸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구로사와는 1950년대 영화 비평계에서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구로사와 감독은 그가 제작한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 구로사와 감독은 폭력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이데올로기 충돌을 필름에 담았으며, 때로 답하기 어려운 그러한 주제를 사무라이의 삶을 벗어난 방식으로도 다루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정뱅이 천사(Drunken Angel)]와 [조용한 결투(The Quiet Duel)] 또는 1944년에 제작된 선전 영화 [가장 아름답게(The Most Beautiful)]와 같은 작품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질병이나 알코올 중독 또는 그와 유사한 고난을 겪는 인물의 내적 충돌을 다룬바 있다.

그의 작품은 비평을 위해 박제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서구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작품특성과 주제가 재해석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매그니피센트 7(Magnificent Seven)]의 서사는 [7인의 사무라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유명한 명작인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는 구로사와의 [요짐보(Yojimbo)]와 지나치게 유사했기 때문에 감독인 세르조 레오네(Sergio Leone)가 도호 프로듀션에게 저작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The Hidden Fortress)]에서 [스타 워즈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Star Wars: A New Hope)]의 제작을 위한 영감을 얻었으며, 이후 보답으로 구로사와 감독이 몽환적인 드라마 [꿈(Dreams)]을 만들 때 제작을 도와주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또한 충만한 액션과 드라마로 구로사와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게임을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플레이어는 쓰시마의 군주 시무라(Shimura)가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전통, 용기, 명예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시무라는 사무라이의 정신을 주장하며 수하를 규합시킨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죽을 것이며, 그들의 백성을 위해 죽을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올 것이다. 영광과 전통 그리고 용기가 사무라이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믿음은 근래의 것이고, 구로사와 또한 그렇게 주장한적이 없다. 위의 메시지는 오늘날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이 말하는 “정신(The code)*”과 풀 수 없게 얽혀있다.

*역주: 코드는 주로 공통된 정치 이념과 성향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한국에서 익숙한 정신으로 번역했습니다.


“현대” 무사도 정신(Bushido code), 1900년대 니토베 이나조(Inazō Nitobe)가 재해석한 무사도 정신은 일본의 군대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사도 정신의 가장 쉬운 예로는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식 명칭으로는 순풍특공대(Tokubetsu Kōgekitai)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포로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때까지 충성과 명예를 앞세우던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무사도 정신은 국수주의 세력 안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다.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인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은 2019년 레이와 시대의 도래를 기념하기 위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아티스트 아마노 요시타카(Yoshitaka Amano)에게 일본 총리 아베 신조(Shinzo Abe)를 사무라이로 그려줄 것을 의뢰한 바 있다. 또한, 중도 우파를 자칭하는 자민당(LDP)의 맴버 다수는 교과서에 실린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삭제하는 역사 왜곡을 돕거나 주도한 경력이 있다. 아베 본인 또한 외국인 혐오 교육을 지원해 왔으며, 그의 아내는 반일과 반중을 앞세운 국수주의 학교의 설립을 위해 9천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또한 일본의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Nippon Kaigi)의 맴버이기도 하다. 미 의회 보고에 따르면 해당 단체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를 서구 식민지에서 해방했기에 일본은 찬사를 받아야 하며, 1946~1948년의 극동국제군사재판(Tokyo War Crimes tribunals)은 불법이고, 1937년 일본 제국군에 의해 일어난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 거짓이자 날조”라고 믿는 단체 중 한 곳이다. 아베와 일본회의는 일본의 상비군 복권을 허용하기 위해 일본 헌법, 특히 9조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임기의 끝이 다가오는 2021까지 일본 헌법 개정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실제로 그는 2013년부터 매년 꾸준히 전쟁 범죄자를 기리기 위해 아쿠스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전쟁 범죄자 중에는 현대 무사도 정신의 모범으로 포장된 그의 조부도 포함되어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의회와 국수주의 이념을 옹호함으로써, 일본의 반 진보적인 국수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주의적 가치관은 일본의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또 다른 국가주의 세력인 일본 제일당(Japan First Party)의 사쿠라이 마코도(Makoto Sakurai)가 178,784표를 얻기도 했다. 그는 재일 한국인을 겨냥한 혐오 시위에 여러 번 발언자로 참가한 경력이 있다.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이 정립하고 활용했던 무사도 정신을 떠받들고 있다. 이는 마치 서구 언론이 기사도 정신을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 무사도 정신과 기사도 정신이 대표하는 집단은 백성을 깊이 배려하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이들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라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사무라이에 대한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신념과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하게 뒤섞여있다. 그래서 서양에서 사무라이의 전승을 다룰 때는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서양의 연극에서 일부 영향을 받은 구로사와의 후기 작품은 사무라이와 전국 시대 사무라이의 역할을 비판하고 있다.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짙게 각색한 [란(Ran)]이나 하위 계급의 범죄자가 봉건 영주를 흉내 내는 [카케무샤(Kagemusha)]같은 작품은 사무라이가 그 시대 하위 계층과 같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명예와 기사도에 충실하지 않은 집단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을 통해 사무라이의 개념을 해체한다.

구로사와 감독의 대작과는 달리, 그가 경력 막바지에 보여 주었던 비판적인 메시지는 서구에 잘 전달되지 못했다. 2003년 서구에서 제작된 영화인 [마지막 사무라이(The Last Samurai)]는 민중과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사무라이 군주를 그리고 있다. 봉건제 일본 사회의 인물을 지나치게 낭만화한 잘못된 인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어털트 스윔(Adult Swim)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 [사무라이 잭(Samurai Jack)]과 딤프스(Dimps)와 폴리곤 매직(Polygon Magic)이 [7인의 사무라이]를 재해석한 게임 [7인의 사무라이 20XX]도 유사한 잘못을 저질렀다. 특히 [7인의 사무라이 20XX]는 공식 판권을 얻었음에도 대실패했다. 서구에서 다루어지는 외로운 방랑 무사의 이야기는 미국 서부 물의 총잡이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그렇다면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어떨까. 클로즈업 카메라를 통해 배우 각각의 감정을 담아내는 기법이나, 정돈되지 않은 자연과 봉건제 시대의 작은 마을을 파노라마 샷으로 담아내는 감각은 분명 구로사와 감독의 느낌이 난다. 이는 폭스와 그의 팀이 이룩한 성과이다. 그러나 진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알게 된다. 게임이 구로사와 감독에게 표하는 존경은 다른 아무 흑백 영화에도 대입할 수 있다.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이나 다른 사무라이 영화가 지닌 서사의 특징과 상징을 파악하는 것이 영화의 고유한 샷만큼이나 중요하다. 구로사와 모드가 게임에 들어 있다고 해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특징이 게임에 온전히 반영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국가 정체성에 대해 논할만한 맥락을 지닌 서구 백인 학자는 얼마 없을 겁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구로사와의 작품에 대한 서구의 해석에 대해 논할 때, 베트남 여성이자 아트 디렉터인 토리 힌(Tori Huynh)이 한 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맥락은 일본인이나 다른 아시아인들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영화의 오리엔탈리즘은 기묘할 정도로 일본의 고통과 죄책감에 집착하고 있고, 학술계 또한 그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중략- 구로사와 감독의 심미성을 다룰 때는 아무 문제 없겠지만, 그의 이념에 대해 다룬다면 또 다른 문제겠지요.”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는 진이 일대일 대결을 벌일 때마다 화등이나 색색의 꽃이 가득한 배경을 이용해 둘 사이의 긴장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이는 분명하게 구로사와의 작품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대결은 진의 오해로 인해 빚어진다. 신화 속의 검이나 갑옷을 얻기 위한 사이드 퀘스트 때문에 발을 뻗지 않아도 될 곳에 발을 뻗어서 일어나는 대결인 것이다. 이는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거나 긴장을 유발하는 대신, 단순한 무대로 반복되기 때문에 시각적인 만족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폭스와 서커펀치의 대본에서 사무라이는 일본의 폭력적인 지주가 아니라, 봉건제 일본을 지키는 진정한 수호자로 대우받는다. 게임은 진을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쓰시마를 되찾는 수호자로 그린다. 섬을 뒤덮은 혼란 속에서 도적들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고, 사무라이로서의 명예와 도덕을 버리더라도 외적의 침략에 맞서는 것이다.

진은 그가 구해야 하는 목숨과 그의 명예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이는 곧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게 되며 게임은 도덕적으로 흐릿하게 끝난다. 그와 그 주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진의 회상 장면에서 진이 암살파트 의외의 부분에서 누군가를 암살하면 진의 삼촌인 시무라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며 진을 꾸짖는다. 적대 세력의 칸이 진이 암습을 가했다고 시무라에게 귀띔하는 부분도 비슷한 맥락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이를 피해 간다고 해도, 결국 게임의 이야기는 진이 백성을 구하는 동안 그의 명예와 충돌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민족주의 판타지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을 해보면 이 게임은 외부인이 만든 게임처럼 느껴진다. 복잡한 문화를 낡은 흑백 필름을 통해 단순하게 받아들인 외부인이 만든 게임인 것이다. 게임 플레이는 부드럽고 영웅의 애니메이션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게임은 참고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만든 창작자들은 게임이 멋들어진 유사 역사 드라마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패미통(Famitsu)과의 인터뷰에서 서커 펀치의 크리스 짐머만(Chris Zimmerman)은 “일본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멋지다고 느끼거나, 역사 드라마처럼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영광일 겁니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게임은 영화처럼 느껴지는 일 대 일 대결과 같이 “쿨”해 보이는 외관을 만들어 내기는 했다.

버지(The Verge)와의 인터뷰에서 폭스는 말했다. “게임이 역사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고증을 자세히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는 게임의 이야기가 사무라이를 다루는 방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게임을 개발하는 중에는 알지 못했겠지만, 서커 펀치가 만든 사무라이에 대한 이미지와 우상화는 결국 그들의 책임이다. 게임이 쓰시마에서 일어난 사건을 역사적으로 고증할 필요는 없으나, 게임이 상징하는 사무라이는 국수주의자들이 왜곡한 역사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 만약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무대로 삼은 시대의 계급 충돌을 다루었다면 영감을 받은 원작에 실로 충실한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그저 한 시대를 “쿨”하게 다루었을 뿐, 그 시대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게임이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에게 이토록 영감을 받고 싶었으면 영화나 글 같은 다른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은 주제를 연구하고 연구의 결과를 드러냈어야 한다. 창작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시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오픈 월드를 위한 배경으로 전락한 문화의 역사는 실제로 무엇인가? 왜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작품을 만들고 말았는가? 게임은 이러한 질문을 그저 겉핥기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구로사와의 작품을 게임을 통해 체험해볼 수는 있어도 정작 구로사와의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게임이 배경으로 삼은 국가의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 게임의 창작자들에게 있어 구로사와의 작품이란 그저 흑백일 뿐이다.



2020. 7. 22.

게임 업계의 성차별과 괴롭힘은 유명인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업계의 성차별과 괴롭힘은 유명인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

여기 경험자가 말한다


원문: Sexism and harassment in the games industry isn't just about big names: the entire culture must change

저자: Emma Kent 



 첫 고발이 휩쓸고 지나간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게임업계는 두 번째 미투 물결을 겪고 있다. 충격적인 규모의 물결이다. 이스포츠, 스트리밍 플랫폼, 게임 개발, 게임 언론 등 보이는 곳마다 오랜 고통과 침묵을 안고 있던 성차별과 괴롭힘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 권력을 남용한 사람 중 일부가 이제야 행동에 따른 결과를 맞이하고 있다.

고발 일부는 충격적이지만 게임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과 논 바이너리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차별과 괴롭힘은 업계에 만연해 있고,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괴롭힘을 당함은 물론 친구와 직업을 잃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업계의 유명인을 가해자를 고발한 생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권력을 지닌 가해자를 업계에서 쫓아내는 일은 업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반드시 지속하여야 한다. 한편 대중매체의 경향성도 유의해야 한다. 큰 이름을 가진 포식자는 노릴 줄 알지만 정작 그 포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는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임업계의 성폭력과 괴롭힘은 고질적인 문제이며 드문 일이 아니다. 게임과 엮인 모든 젊은 여성은 각각 경험한 바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나 또한 업계에 들어온 지 2개월도 되지 않아 신체적인 성희롱을 경험했다. 처음 E3에 참가한 그해 말, 누군가가 나에게 고용될 기회를 줄 수 있다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자고 말을 꺼냈다. 이어 나는 불쾌하고 부적절한 메시지를 받았다. 업계 신입이자 젊은 여성이었던 나는(난생처음 당한 일이었고 심지어 인턴이었다) 도움을 받을 지인도 지원도 부족했다. 업계에서 걱정거리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경력에 해를 끼칠까 두려워했다. 당시 나는 약했고, 가해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줄곧 고통받아왔다. 내가 겪은 감정적인 고통은 어떻게 서술해도 과장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의심과 공포 그리고 사회의 시선 때문에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사건 후 몇 달이 지나도록 친부모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핑계를 댔다. “과민반응(overreacting)”이라며 자신을 탓했다. 내 이기심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가해자가 또 누구를 괴롭힐지 몰라 걱정했고, 내 침묵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미투 운동이 공공 담론에 등장할 때마다, 나는 앞으로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몸살이 날 정도로 고민했다.

마침내 나는 말하기로 했다. 나를 성적으로 괴롭힌 남자는 행동에 대가를 치렀다. 용감한 생존자들에 힘입어 나는 내 목소리를 생존자들의 경험에 보탤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짐을 다소 덜 수 있었다. 이러한 내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게임업계에는 가해를 조장하는 문화가 있다. 우리는 업계의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여기 근본적이고 거대한 문제가 있다. 성차별과 직장 내 학대. 이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게임업계의 성차별과 직장 내 학대는 게임업계의 구조와 얽혀 있다. 게임업계는 취직 문턱이 높고 경력자의 추천이 매우 중요하며 고용이 불안정한 저소득 업종이 많다. (인디 개발자나 프리랜서 또는 최근에 해직당한 이에게 물어보라) 종종 게임을 향한 열정이 악용되기도 한다. 가해자는 이러한 업계의 불안전성에서 권력을 얻으며 직간접적으로 피해자의 직업과 생계를 위협한다.

이렇게 굳어진 경제적인 문제는 어디서 부 터 풀어야 할까? 공개적인 토론과 노조 활동 그리고 기업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업계는 해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동안 우리는 업계의 권력 구조를 살펴보고, 가장 약한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 지원을 위해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를 포함한 생존자의 경험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학대나 성희롱을 겪는 것은 주로 업계에 막 들어온 신입이다. 이들은 인맥을 만들지 못해 조직에서 고립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으므로 가해자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며, 경쟁이 심한 업계에서 살아남고자 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이들의 생계를 좌우할 수 있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내 경험을 통해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다. 가해자가 업계의 과음 문화를 이용한다는 사실 말이다.

게임업계는 괴롭힘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바로 과음이다. 게임업계에는 관계 형성을 핑계로 한도를 넘는 음주를 권장하는 문화가 있다. 거의 대다수의 교류 행사가 술을 중심으로 짜여있으며, 그곳에서 최악의 행위가 일어난다. 취기의 즐거움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가장 무력한 순간을 노릴 수 있게 만들며, 가해자가 “만취 상태” 였다는 핑계를 댈 수 있게 만든다. (애초에 핑계가 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무엇보다 심각한 사실은 인맥 형성과 승진을 빌미로 업계가 신입의 행사 참여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해로운 사례가 모여 해로운 결과를 만드는 셈이다.

한시라도 빨리 행사에서 음주를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음주를 하더라도 책임감 있게 절제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도 환영받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경험했던 가상공간 행사도 충분히 선택 가능한 대안이다. 가상공간을 이용한 행사는 더 안전하고 열려있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업계의 음주 문화의 개혁을 위해 이벤트 기획자뿐만이 아니라, 문제에 일조한 업계 전체가 고민해야만 한다. 과음을 기준으로 “전설”적인 행사를 평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공적인 행사에서 과음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남녀대비 낮은 여성 종사자 수와 여성의 낮은 급여 또한 개선해야 할 것이다. IGDA의 2019년 개발자 만족도 조사에 따른 업계의 성비는 남성이 71%, 여성이 24% 그리고 논 바이너리가 3%(별도 질문에 따라 트레스젠더로 식별된 4%)이다. 그리고 지난해 영국의 성별 임금 격차 보고서를 보면 19개의 대형 게임 관련 기업의 평균 임금 격차가 18.8%에 달했다. 게임 언론도 성별 격차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유로 게이머가 지적 당한 것과 같이 게임 언론에서 상위 관리직에 진출하는 여성은 극히 소수이다.

이는 직업 기회의 평등은 물론 더 다양한 직업 환경을 통해 가해에 취약한 이들을 지원할 수 있기에 중요하다. 실제로 내가 재직 중인 유로 게이머에서 나는 지난 2년간 여성 직원이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더 자주 공론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임업계에서 일어났던 미투 운동에 힘입어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도울 수 있었다. 이처럼 더 많은 여성의 업계 참여는 고립으로 인한 위험의 감소와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통한 경험의 공유 기회를 제공한다. 라이엇과 같은 일부 기업의 해로운 작업 환경은 여성의 부족, 특히 여성 리더쉽의 부제가 큰 원인이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급여 격차를 보여주는 데이터는 여성의 동일노동 저임금 현상은 물론, 고위직 여성의 결여가 기업 문화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작년 보고에서 다룬 바 있듯, 상위직으로 진출하기 위한 여성의 인재 수가 부족한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계가 여성을 교육하는 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업계는 여성이 상위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은 신체적, 정신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는 직원을 지원할 방안을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고발을 위한 보고 자료를 접하기 쉽게 만드는 간단한 일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뚜렷하고 투명한 인사 정책을 구성하여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직원이 행동에 유의하고 학대를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기업의 직원 교육은 매우 중요하지만 정작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업이 성희롱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직원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오랜 기간 문제가 되어 온 것이 또 하나 있다. 게임과 게임 커뮤니티가 안고 있는 유해성 문제이다. 기업과 플랫폼이 커뮤니티 또는 플레이어의 해로운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거듭 책임에서 벗어나는 해로운 환경이 조성된다. 예로 2018년 [팀 포트리스2]의 커뮤니티를 보자. 온라인에서 학대를 경험한 이들은 밸브가 커뮤니티를 관리하지 못해서 학대가 커뮤니티에서 통용되었다고 증언한다. (이는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난 괴롭힘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018년과 2019년 조사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보자. 조사에 따르면 여성 게이머 3명 중 1명이 남성 게이머로부터 학대를 경험했으며, 14%가 강간 위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괴롭힘과 학대가 일상이 되고, 여성과 소수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문화가 넓게 퍼진 결과 게임업계와 온라인 양쪽에서 학대가 빈발하고 있다. 기업에 자사의 게임 커뮤니티에 이토록 무관심하다면, 기업 내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심해 봐야 한다.

게임 커뮤니티의 유해성은 단일 기업의 관리를 벗어난 다양한 플랫폼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해결이 굉장히 어렵다. 다행히 많은 배급사와 개발자가 유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인다. (Fair Play Alliance같은 단체가 결성되기도 했다)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작은 변화가 있다. 우리는 기업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행동을 고발해야만 한다. 언젠가 업계 관계자가 모인 자리에서, 대중의 분노를 우려한 결과 스튜디오에서 일어난 부적절한 발언을 논쟁 없이 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나 어색하더라도 선을 넘은 행동에 대해서는 선을 넘었다고 경고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쁜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을 일삼는 이들을 막는 방법은 “사소한”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는 것이다.

학대와 괴롭힘을 둘러싼 편견을 줄여나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편견을 줄여나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생존자의 경험을 경청하고 우리의 일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녀를 교육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동의란 무엇인지 그리고 괴롭힘당했을 때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교육해야 한다. 나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을 겪어야 했고,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생존자가 나서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왜 인사과나 경찰에 가해자를 정식으로 신고하기 어려울까? 간혹 생존자들이 법적인 절차를 통해 가해자를 고발하는 대신, 온라인에서 고발하는 것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인사과가 존재하지 않는 독립 개발자이거나, 가해자가 좁은 업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이때 가해자를 온라인에 고발하는 것은 마지못해 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가해자를 온라인에 고발하는 일은 경력에 오점으로 남을 수 있고, 업계에서 이룬 업적이 아닌 “그때 고발했던 사람”으로 기억될 위험을 안고 있다. 심지어 소송에 시달릴 위험은 물론 온라인을 통한 또 다른 괴롭힘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생존자를 신용하기 위해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다수의 연구가 거짓 고발은 극히 소수임을 증명함에 주목하자. 2012년 영국 법무부의 조사 결과를 보면 1149건의 강간 사건 중 거짓 고발은 3% 미만이었다. 최근 사회의 인식 변화 덕분에 생존자의 고발은 어느 때보다 증가했다. 그러나 작년 통계에 따르면 공격자가 법정에 서거나,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은 10년 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가디언의 보도를 참고) 미투 운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사법재판이 아니다. 미투 운동은 처벌받아야 할 이를 처벌하지 못하는 제도의 한계와 필요한 법이 부재한 현실을 지적하는 운동이다. 미투 운동은 문제의 규모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당국과 기업 그리고 업계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글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영역이 있다. 필자의 경험에 근거해서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인종차별과 동성애, 트랜스 혐오가 뒤섞인 복잡한 성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은 미처 다루지 못했다. 그리고 남성 역시 학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남성 우월주의적인 문화 때문에 “약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는 현실을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들어 알고 있다. 이스포츠와 스트리밍 커뮤니티 또한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창작자와 팬 간의 권력 문제와 책임 소재의 불투명함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앞으로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유명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유명한 가해자를 처벌한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업계와 조직 모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단기적인 변화 그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끝으로 업계에서 성폭행이나 괴롭힘을 당했지만 나서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에게 조언을 남기고 싶다. 비공개적인 네트워크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첫걸음이었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말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현실을 재인식하고 마음의 짐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내 이야기를 듣고 “아니, 그건 잘못된 일이야.”라고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법이다. 당신의 경험이 타인의 경험에 비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당신의 경험을 그렇게 덮어버리지 말자.

솔직히 말해 이 글을 쓴 뒤에 닥쳐올 일이 두렵다. 누군가에게 나설 용기를 주고, 업계 문화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할지라도 두렵다. 그게 바로 성폭행이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두 선택 모두 끔찍하지만, 둘 중 한 가지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필자는 말했다. 감내할만한 선택이었다. 상처를 잊을 수 없지만 그 무엇도 잊게 해주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