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 필요한 글이라 생각되어 2014년 가마수트라(Gamasutra)에 Leigh Alexander가 투고한 글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게이머라는 단어의 의미와 시대에 따른 변화를 알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글이 올라온 2014년 당시, 한창 게이머게이트가 논란이었습니다. Leigh Alexander는 당시 최전선에서 싸운 언론인입니다. 지금은 FBI의 게이머게이트 보고서를 통해, 당사자에 대한 주요 논란이 거짓이었고, 실상은 혐오범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태입니다. 지금부터 읽으실 그녀의 글은 이 블로그에서 게임을 다루는 시각을 대변하는 글이라고 봐도 무관한 글입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게이머”는 당신의 청중일 필요가 없다. “게이머”는 끝났다.
'Gamers' don't have to be your audience. 'Gamers' are over.
August 28, 2014 | By Leigh Alexander
이따끔 나는 나를 게임 문화(Game culture) 작가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알다시피 ‘게임 문화’는 다소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은 문화라기 보다 소비다. 반복되는 농담과 인터넷 밈으로 채워져 있는 게임 문화가 인터넷에서 날뛰고 있다.
그것은 버섯 모자를 쓴 젊은 남성이 버섯 인형을 들고, 가방을 매고, 특전 포스터를 옆구리에 낀채 줄을 서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그들은 판매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몇 시간이고 열정적으로 줄을 선다. 무언가를 살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긴 줄을 비추면, 그들은 왜 거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온라인에서 '게임 문화'는 ‘게임 저널리즘의 윤리’와 사회 정의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자 선언한. 대인 관계에 서툴고, 전문 직업을 가진 삶에 대한 경험 없는 소수만의 것이다. 바른 인간으로써, 근엄한 표정으로, 비디오 게임을 위하여-!
요즘 나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알고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이보다 나아져야 한다. 게이머게이트에 대한 옹호, 페미니즘 운동가에 대한 폭력, 그러한 이들을 지지하는 업계인, 이러한 것이 우리의 얼굴이고 게임이라는 비즈니스를 대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 깊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만 한다. *역주[1]
우리의 업계에 대해 세상이 알고 있는 전부는 다음과 같다. 십억 달러를 들인 전쟁 시뮬레이터, 터치스크린 캔디 중독자에 대한 머리기사. 이게 전부이다.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이보다 나아야만 한다.
‘분열’을 원치 않는다고? 미숙한 문화의 사막에서 엿 같은 행동을 일삼는 것이 괜찮은 사람과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 것이 누구인가? 지금 여기 어디에 ‘논의’가 존재하는가?
좋다, 그것은 소수의 목소리라고 해두자. 인디 게임과 업계의 선구자들을 포함한 다수는 지난 몇 주간 업계의 대화 방향에 지치고, 격노하고, 낙담했다. 실제 트롤의 편에서 글을 찍어내는 신뢰받는 언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차별주의자들에게 지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별것도 아닌 과실을 위해 업계 전체가 비난받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책임을 포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따금 트위터에서 게임 커뮤니티의 열성 이용자들이 혐오 집단에 엮이고는 한다. 그러면 커뮤니티는 이렇게 대응한다. "게시판에서 혐오 표현을 삭제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삭제된 내용은 커뮤니티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삭제된 바로 그 내용이 그 커뮤니티를 대변한다. 당신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그렇게 인식한다.
우리가 우리 공간의 문화를 만들거나 조율하는 것을 거부할 때, 그 공백에서 생겨난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게 바로 게임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기이하면서도 현명한 게임 외부의 선구자들은 줄곧 게임을 발견해왔다. 술집을 더 재미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아케이드 게임을 도입했고, 훌륭한 문화 교류의 장으로 머드(MUD)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업계의 큰손들은 ‘얼리어답터’를 위한 하이테크로써 게임을 팔고자 했다. 얼리어답터 = 물건에 낭비할 소득을 가진 젊은 백인 남성(dude) 말이다.
갑자기 외로운 지하실 아이들 세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그들이 가장 큰 고객이었다고. 마케터가 그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마케터들은 빛나는 블라우스와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그들이 만드는 모든 것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들과 동일한 이해를 둔 약속된 최우수 고객에게 게임을 팔기 위해서.
밀레니엄 시대로 접어들 때쯤에는 단 하나의 지표만 남고 말았다. 돈을 가져라. 여자를 가져라. 총을 가져라, 더 큰 총을 가져라. 그렇게 게임은 사회의 외톨이가 되었다. 정말 축하한다. 당신은 저항으로 부터 승리하기 위해,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게임뿐이다. 대중은 무엇을 사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 목적인 언론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은 점수를 매기고 타이틀을 서로 경쟁시키면서, 업계와 창작자를 괴롭히기 딱 좋은 ‘팀 스포츠’에 불을 지폈다.
그 시기의 비디오 게임이 오늘날, 도덕적 공황의 희생양이 된것은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고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십 대 백인 소년들에 의해 게임에서는 극악한 일들이 저질러졌다. 그러나 게임은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게임과 게이머 모두 불안에 휩싸여 있었을 뿐이다. 그 안에서는 작고 검게 스멀거리는 그것을 외부에서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2014년 오늘날 업계는 변했다. 우리는 여전히 화가 난 남성이 비디오 게임의 주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소비층의 소프트웨어 평균 매출은 해마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미 예측 가능한 소수의 브랜드만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역주[2]
과거에 시장을 이끈 이들은 오늘날 확실히 성장했다. 게임의 토양은 비옥해졌다. 다채로운 작은 게임들이 하늘거리고, 창의성이 커뮤니티의 싹을 틔운다. 단순한 소비가 아닌, 자기표현과 성숙한 지원이 쏟아진다. 그곳에는 새로운 청중과 새로운 창작자들이 살아있다. 벌레가 탈피하듯 문화와 상업 양방향으로 낡은 “게이밍(gaming)”이라는 단어를 이제 탈피할 때가 되었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복잡함을 더해가는 매체는 탄산음료에 취해있는 이들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척 힘든 일이다. 그들은 그들이 더는 최우수 고객이 아니라는 사실. 그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전문적인 업계 사이트에서 조차 근시안적인 댓글들이 발견되고는 한다. 우리는 그런 콘텐츠 제작자들의 당혹스럽고 완고한 침묵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새로운 청중을 원치 않는 문자 그대로 올드 스쿨한 개발자들에게 변화는 힘든 일일 것이다. 잘 알고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나 만화책이 아닌 다른 참고 자료를 찾아야 하다니? 어린아이와 나이든 남자. 모두에게 똑같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 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이머의 자존심”에 밀리고 구매 안내서의 일방적인 통계에 특별 관심 장르로 분류되던 이들, 새로운 세대의 제작자와 그 팬들은 더 건강한 언어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게임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자주적인 개발자의 인생을 쓰는 일이 되었다. 더는 협력에 목말라하는 기업에 협조하지 않는다. 게임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제 “평론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게임을 사야 할지 알려주는 일 또한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지원할지 또는 누구를 지원할지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다.
허수아비같은 ‘게임 저널리즘 윤리’는 이미 낡은 가치이다. ‘리포터’라고 불리며 광고 계약을 성사시키고 리뷰 점수를 기록하던, 우리가 우리의 청중만큼이나 약한 존재이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 게임 저널리즘 작가의 일은 창작이다.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매체에서 문화를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화론과 포용에 대한 공격의 깃발로 ‘윤리’를 목에 매고 울부짖는 트롤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제작자와 작가 모두, 게임이 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은 것들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 도달하고 있다. 점차 가까워질 것이다 - 게임이 희비극, 뮤지컬, 삽화, 꿈의 세계, 가족 이야기, 민속학, 추상 미술이기를 원한다. 게임은 이제 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여기에서 배제되기를 원치 않는다.
특정 집단만을 칭하는 그래서 점차 사용을 꺼리는 "게이머"라는 딱지.
그 게이머는 끝났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다.
둔한 바보, 생각 없는 과소비자, 아이처럼 구는 인터넷 논객. 그들은 내 청중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의 청중일 필요도 없다.
한쪽 "편"을 들거나 "논의"를 가질 필요조차 없다.
거기에 과거가 있고 여기에 현재가 있다.
바로 여기, 앞으로 미래에 당신이 즐길 역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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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1]
원문에서는 게이머게이트를 옹호하는 미디어, 비디오 게임을 통해 패미니즘 캠페인을연 Anita Sarkeesian이 당한 폭력을 링크로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All of us should be better than this. You should be deeply questioning your life choices if this and this and this are the prominent public face your business presents to the rest of the world.] 원문에서는 관련 글을 링크하고 “이것”이라고 표현하나, 이미 삭제된 글이 다수라 의역하였습니다.
*역주[2]
‘어라?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것 같아 덧붙여 말합니다.
2016년 미국의 ESA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게임을 즐기는 성비는 남 59% 여 41%입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게임을 구매하는 연령은 성별구분 없이 38세입니다. 남녀 성비가 거의 균등하며, 평균 연령이 과거보다 높아졌기 때문에 해당 세대의 사회 인식이 게임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역주+@
맙소사. 마지막 부분이 누락되어 있기에 추가합니다. 이걸 이제야 알다니.
2017-06-10 다시 한번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