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게임의 목표는 게임이 의도한 분위기와 이야기를 온전히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걷는 게임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게임이 변한다는 것은 게임의 분위기와 이야기가 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게임에 변화를 기대합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가치 있는 행동을 하길 원하며 그것은 게임의 변화로서 증명됩니다. 걷는 게임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플레이어가 게임의 정보를 수집해서 이야기를 해석하는 상호작용을 하는 게임이지만, 이는 게임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고 게임보다는 소설이나 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걷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라는 비평에 자주 직면합니다. 걷는 것, 게임에서의 이동만으로는 가치 있는 행동으로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변화를 기대하는데 게임은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기발한 답을 제시한 게임이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바꾸기 전에, 플레이어의 기대를 뛰어넘어 게임이 먼저 변해 버리면 어떨까요? [What Remains of Edith Finch]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만들어 둔 변화에 참여시키는 것을 통해 플레이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 게임입니다. 게임의 구성은 일반적인 걷는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플레이어의 조작은 억제되어 있고, 게임은 이야기와 분위기의 전달에 모든 자원을 투자합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조작의 의미가 게임에서 거듭 변한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가 입력하는 방법(조작)은 같지만, 입력에 따른 게임의 반응, 즉 플레이어의 행동은 게임에서 변화를 거듭합니다. 이는 게임이 행동의 주체와 행동이 일어나는 무대를 급격하게 바꿀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플레이어가 다양한 체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고 행동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재미를 느낍니다. 게임 전체가 조작하는 방법을 밝혀내는 퍼즐 또는 추리 게임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일반적으로 플레이어가 게임에 흥미를 잃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꽤 단순한 이유입니다. 바로 준비해둔 변화의 품질이 엄청나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고, 행동에 만족할 수 있도록 뛰어난 연출을 도입했습니다. 게임 전체가 집착에 가까울 만큼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어 있어서 가능한 역할 전환입니다. 그러나 결국 급격하게 변화하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의 맥락이 희미해졌다는 인상은 피하기 힘듭니다. 화려하고 인상적인 무대가 끝난 뒤에 남은 것은 완성된 이야기를 체험한 뒤에 남는 깊은 여운이 아니라, 도착지를 찾지 못한 공허함이었습니다. [What Remains of Edith Finch]는 체험을 다양하게 만들어 걷는 게임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게임의 변화가 이야기 전달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작품입니다. 이는 꼭 걷는 게임이라는 장르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당장 어찌 될 문제도 아니므로 이것을 걸고넘어지는 것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장르를 넘어 게임의 한계에 도전한 게임이니만큼, 그 한계에 부딪힌 결과를 보는 것은 복잡한 심경입니다.
플랫폼: PC, XBOX, PS4
가격: 2만 1천원
편의: 쉬움
제작: Giant Sparrow
좌표: 스팀